공동체 짓밟는 검사-종교인-의사집단
공동체 짓밟는 검사-종교인-의사집단
  • 이병국
  • 승인 2020.09.0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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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끼리'는 달라

'우리'라는 말과 '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성정(性情)을 표현한다면 '우리'에는 보편성과 공정성이 담겨있고, '끼리'에는 소수집단이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검사들이 준동했으나 공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검찰춘장'이라는 말에서 보듯 그들은 건국 이래, 좀 더 확실히는 박정희가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이후 집요하고 과단성 있게 집단이익에 몰입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군사반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놨습니다.
최근 검찰인사에서 왜 검사들이 악다구니를 써가며 거의 패륜행동으로 공동체라는 우물에 침을 뱉고 떠나겠습니까.
그들은 대한민국이 망해간다 혹은 망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발언 해놓고, 변호사로 되돌아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 물을 마시고 살아갑니다.
검찰은 국가 공조직입니다.
책임과 권한이 명확합니다.
개인을 사회와 격리시키는 '권력'을 행사하다보니 그에 물 익어 지금껏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했고, 그 행동이 잘못됐을 때 사과하지 않는 것이 버릇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이른바 간첩사건은 최근까지 이어져왔고, 그 판결이 뒤집어져서 공동체-국가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종교인이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종교집단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신(神)을 놓고, 그들 표현대로 소위 '영업'을 하면서 종교 자유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공동체에 코로나19를 확산시켰다는 눈에 보이는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듯합니다.
생명이 우선입니다. 펄떡펄떡 살아있는 생명이 있어야 종교 자유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은 지구에는 적막감이 감돌 것입니다.
종교 자유를 생명처럼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은 생명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선견(先見)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살아남은 것과 죽은 것으로 나누는 선견은 차별입니다.
그것은 선견(善見)과는 다릅니다.
'중세암흑 1000년'이라는 참혹하고 저주스러울 정도로 긴 시간을 겪고서도 '기도 합시다'라는 심상(心象)이 당당하고 단단한 듯합니다.
2020년이 지났습니다. 설혹 창조론을 믿더라도 그 믿음은 선(善)과 함께했을 때 빛이 난다는 것이 일반상식입니다.
코로나19 시대에 집단면역을 실천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내버려 두라' 혹은 '내버려 두자'는 집단면역은 죽을 자는 죽고, 산 자는 살자는 방식입니다.
▲의사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의대정원 확대·공공의대 설립·원격진료·첩약 급여화 등를 의료정책 4대악으로 파업하고 있습니다만 그 본질은 '먹고살기 어렵다'로 파악됩니다.
환자에게서 돈을 더 받아내야겠다는 것입니다.
현재 시세가 월급의사는 최소 연 3억 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먹고살기가 어렵다며 집단행동 합니다.
더군다나 의사인력을 늘리는 것에 극렬 반대합니다.
절차와 과정을 살펴본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공동체를 치료할 의사 절대 숫자가 부족하다는데, 살릴 수 있는 생명이 죽어나간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끼리끼리'는 이제 그만 멈추면 좋겠습니다.
명예와 부(富), 모두 사람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쏟아 부은 뒤에야 '시민의식' '공동체정신'이 공동선(共同善)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세상 60억 인구 중에서 '유일한 나'로 보편하게 살아가는 가치이자 방식입니다.
나를 포함한 우리가 지구라는 바탕 위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